덕수궁은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
임진왜란 이후 모두 불탄 궁궐 대신 전란에 살아 남은 월산대군의 저택(왜군의 주둔지 였음)을 궁- 경운궁이라 이름이 붙음 – 으로 잠시 사용하다, 광해군시기에 창덕궁 창경궁이 복구 되고 경희궁도 공사가 완공 되어 사용을 하지 않게 되어 빈 궁궐로 있다가
을미사변- 민비 시해 이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했던 고종이 근처의 궁을 – 주위에 영국 미국 러시아 공사관이 있어 – 왜인 들의 패악질시 피할수 있는 위치인지라 경운궁을 개보수하여 적수궁이라 이름 지어 사용 하엿다.
따라서 덕수궁은 개화기 이후에 지은 궁이라 고궁이 아니라, 근대에 지은 궁이라 할수 있다.
덕수궁의 규모는 고종이 황제임을 선언하면서 중건한 건물이라 규모가 지금의 규묘보다 컸으나,
구한말과 일본강점기 근대화 현대화의 시기를를 거치며 상당부문 헐려 나가고 현재의 규모로 축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나무 위키를 참고 하자
덕수궁 규모 추정도
현재 복원 공사 중인
대한문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중화문아해 남쪽 문이 정문이 었으나 길을 내면서 헐리고 , 대안문이 남문이 되었다. 나중에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위치는 1970년에 이전되어온 위치이다.
현재 월대 복원 공사가 한창이고.. 그 앞에 서 하던 수문장 교대식은 입구에서 옆으로 빈공간에서 하고 있다. 오전열한시..시간을 맞추어 도착 할수 있도록 하자. 캠장에서 적어도 여덟시 반에는 출발 하도록 하자.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B%8C%80%ED%95%9C%EB%AC%B8
금천교
조선의 궁궐 입구애는 사악한 기운이 넘어 들어 오지 못하도록 개울을 만들고 그 위에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시대 궁궐 진입부에 있는 개천은 주술적으로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금천(禁川)이라 했다. 풍수지리적으로 궁궐의 앞쪽에 물이 흘러야 배산임수가 구현되기 때문에 금천은 명당수(明堂水)라고 불리기도 했다. 금천은 궁궐의 정문을 들어서서 처음 나오는 마당을 가로지른다(『태종실록』 11년 9월 5일). 그러므로 공식적인 일로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금천을 건너게 되어 있다. 금천을 건너는 행위는 속세의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경건한 자세로 궁궐에 들어가는 상징적인 의식이 된다. 즉, 형식적인 궁궐의 경계는 궁궐의 문과 담장에 의해 나뉘지만 의식적으로는 금천을 건너는 행위에 의해 구분된다.
금천 :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8%88%EC%B2%9C(%E7%A6%81%E5%B7%9D)
대한제국 초기 덕수궁의 정문은 인화문이었고 중문은 돈례문, 정전은 지금의 즉조당인 태극전[7]이었다. 그래서 금천과 금천교는 인화문과 돈례문 사이에 있었다. 지금의 중화전 마당이다.
약 3년을 그렇게 있다가 1901년(광무 5년)에 제대로 된 정전이 필요하여 새로운 중화전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부지의 부족으로 덕수궁 영역을 남쪽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인화문을 헐고 사람들의 통행이 잦던 동쪽의 대안문[8]을 정문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대안문과 새 중화전 사이에 중문 조원문을 지었으며 대안문과 조원문 사이에 새롭게 금천을 팠고 금천교를 놓았다. 이 때 금천교 다리를 옮긴 건지, 새로 지은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A%B8%88%EC%B2%9C%EA%B5%90
중화문과 중화전 : 보물 819호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D%99%94%EC%A0%84_%EB%B0%8F_%EC%A4%91%ED%99%94%EB%AC%B8
중화문 :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C%A4%91%ED%99%94%EB%AC%B8
중화전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C%A4%91%ED%99%94%EC%A0%84
중화전은 덕수궁의 중심 건물로 임금님이 하례(賀禮)를 받거나 국가 행사를 거행하던 곳이고 중화문은 중화전의 정문이다. 광무 6년(1902)에 지었으나 1904년 불에 타 버려 지금 있는 건물은 1906년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중화전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공포 부재의 형태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곡선이 큰데 이것은 조선 후기 수법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안쪽에는 임금님이 앉는 자리를 더욱 위엄있게 꾸미기 위해 화려한 닫집을 달아 놓았다. 중화문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공포 양식은 중화전과 같이 조선 후기 수법을 가진 다포 양식을 따르고 있다. 원래 좌우로 복도건물(행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동쪽에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궁궐 건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함녕전 덕홍전 정관헌 : 고종의 공간
함녕전은 고정황제가 잠을 자는 침전으로 2012년 부터 2019년 1월 죽을때까지 여기에 머물렀다.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D%95%A8%EB%85%95%EC%A0%84
덕흥전은 경술 국치 이후인 1912년에 지은 권력이 없던 하야한 고종이 시간을 소일 하며 외부 인사들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B%8D%95%ED%99%8D%EC%A0%84
정관헌 커피를 즐긴 고종 황제의 개인 카페쯤 되는 공간으로 추정 된다.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C%A0%95%EA%B4%80%ED%97%8C
고종은 독살 되었나…?
석 조 전
대한제국 역사관 관람 예약 : https://www.deoksugung.go.kr/c/schedule/info/SB 관람 예약 10시 예약 요망
영국인 하딩에 의해서 설계되었고, 최초로 지어진 석조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 양식 – 영국의 버킴엉 궁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 로마 신전 : 파르테논 신전을 생각하면 좋다. 완벽한 좌, 우 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겨울 국치 이후 1910년 12월 완공 되어 공식적인 용도로는 사용 되지 못했고.. 이왕조 미술관으로 사용 하려 했으나 같이 사용 하는 왜인 미술가들이…반발하여 일제 시절 왜인들의 근대 미술관으로 사용 하였고..
현재 현대 미술관으로 사용 하는 석조 건물이 이왕조 소장 미술관으로 사용 되나 국립 현대 미술관 덕수궁관으로 변경 되었다. 현재는 전시가 없다.
국립 현대미술관 덕수궁 관
석조전 복도 : 1938년 석조전과 미술관을 연결하는 복도
석어당
임란후 모든 궁이 불에 타 선조가 돌아와서 사용한 궁궐로,즉조당이라고 불렀다가 정조때 석어당- 임금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 라 부르기 시작 했다. 고종이 아관파천후 돌아와 침전으로 사용 1904년 큰불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른다.
원래 최초 궁으로 지었던 곳이 아니어서 민가 형식의 건물이다.
돈덕전 : 현재 공사중이다
https://namu.wiki/w/%EB%8D%95%EC%88%98%EA%B6%81%20%EB%8F%88%EB%8D%95%EC%A0%84
석조전 뒤 건물로 덕수궁 대화재(1904) 이전 완공되어 연회용도로 사용 되었다. 러시아제국의 건축가 사바틴(우크라출신 )에 의해 설계 되었다라고 전해진다 – 확실하지 않음 . 사바틴은 명성왕후 시해사건의 외국인 목격자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