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도
돈의문 박물관 마을
국립 기상 박물관 – 기상청 옛터
조선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우리나라 기상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국내 최초 기상과학역사 박물관입니다. 서양보다 200여 년 앞서 발명된, 세계에서 현존하는 유일한 측우기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公州 忠淸監營 測雨器)’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국립기상박물관이 설립된 이곳 서울기상관측소는 우리나라 근현대 기상 역사의 중심지입니다. 1907년 경성 원남동에서 시작된 근현대 기상관측은 낙원동을 거쳐 이곳 송월동으로 이전하였습니다. 1932년 설립 당시의 건물과 1939년 증축된 건물이 현재까지 유지되어왔고, 1998년 기상청이 서울 동작구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기상업무를 이어왔습니다. 이러한 연속성으로 2017년 세계기상기구(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에서 ‘100년 관측소’로 선정되었습니다.
박물관 건립을 시작한 2016년, 국가기록원에서 보관되어 있던 20세기 측후소 건축도면을 바탕으로 ‘서울기상관측소’를 원형으로 복원하였으며, 4년 간에 걸친 실내외 공사로 2020년 10월 30일에 개관하였습니다. 우리나라 기상의 중심지인 국립기상박물관에서 날씨의 변화와 역사를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경 교 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부지 안에 위치해 있는 문화재.
https://namu.wiki/w/%EA%B2%BD%EA%B5%90%EC%9E%A5
1945년 8.15 광복 이후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가 생전에 사용했던 개인 사저(舍邸)이자 김구가 피살당했던 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동안 삼성그룹 계열인 강북삼성병원에서 본관으로 사용했다가 2009년 경교장 전체 복원화가 결정되었고, 이후 2013년 3월 2일에 김구가 살던 시절의 모습으로 일반에 개방되었다.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 등과 함께 해방공간 시절의 3대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는데, 특히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가 광복 이후 상호 대립관계에 놓이면서 이화장과 쌍벽을 이루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1]
2001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받았다가, 2005년 사적 제465호로 승격 지정받았다.
경 희 궁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광해군 9년)에 착공하여 1623년(인조 원년)에 완공했다. 조선 후기 동안 정궁인 창덕궁에 이은 제2의 궁궐로 양대 궁궐 체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 많은 왕들이 경희궁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거처하면서 창덕궁이 지닌 정궁으로서의 기능을 일정 부분 나눠서 수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복궁의 동쪽 궁궐인 창덕궁 + 창경궁을 지칭하는 ‘동궐’과 대비시켜 경복궁의 서쪽 궁궐을 뜻하는 ‘서궐西闕’로 불렀다. 규모로 보자면 경복궁 크기의 2/3를 넘는 영역이 경희궁에 속했고, 서울 한양도성 서쪽 성벽 일부와 한양 서북부를 대부분 차지하던 거대한 궁궐이었다.
경희궁은 한양의 궁궐 중 유일하게 흔적도 없이 완전히 파괴 되었다. 이러한 훼손이 일제의 만행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느 정도 경희궁에 관심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공분하며 일제를 규탄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이전 흥선대원군 시절에 경복궁 중건을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대부분(90%)이 헐렸다. 일제가 경희궁에 손댄 건 경희궁 터에 방치되어 있던 잔여 전각 5개를 외부에 매각한 것 뿐이다.
그러나 문화재청 등에서 발간한 여러 자료에는 이러한 사실이 일절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일제에 의해서 훼손되었다고만 적혀 있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이러한 내막이 거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위키피디아에도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 최근에 발표된 학술논문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단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의 특별전 〈경희궁은 살아있다〉에서는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의 전각을 대부분 해체했다는 내용을 분명히 명시했다.#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처음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앞으로 오해가 바로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일 듯.
게다가 광복 후에도 경희궁 터 위에 지어진 서울고등학교의 존재 때문에 한동안 복원은 꿈도 꾸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한 후에야 경희궁 터의 본격적인 유적 발굴과 복원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경희궁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에 경희궁 터를 소유하고 있던 서울특별시가 잽싸게 그 자리에 서울특별시교육청,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역사박물관 등을 짓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도리어 경희궁 유구가 더욱 훼손되고 말았다. 게다가 서울시는 잔여 경희궁 터를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땅값이 너무 비쌌던 데다가 당시에도 경희궁 부지를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매각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근성의 서울특별시는 그 땅이 경희궁으로 온전히 복원되는 것을 저지하고 끝끝내 서울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경희궁의 잔여 유구를 훼손하고 말았다. 또 일부 부지는 서울특별시가 끝내 민간으로 매각해버렸고 이것이 현재 경희궁 복원의 걸림돌 중 하나가 되고 있다.
남은 전각이 적고 협소한 탓에 조선 5대 궁궐 중 인지도가 가장 낮다. 〈1박 2일〉의 서울특별시 문화유산 특집에서도 5대 궁궐을 문제로 내자, 다른 4개의 궁은 어렵지 않게 맞혔으나 경희궁에서 다들 헤맸다.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이나 역덕후가 아닌 이상 다른 일반인에게도 사정은 비슷할 듯. 훼손이 너무 심하다 보니 책에 따라선 4대 궁을 먼저 묶은 뒤 서울역사박물관과 경희궁터라고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홍 화 문
경희궁의 정문
조선 궁궐의 대문 – 정문은 ‘화(化)’자 돌림을 썼다. 조선이 흥하고 베풀어 교화(化)한다의 의미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덕수궁 대한문은 정문이 아니고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 없어져서 경운궁 인화문이 존재 했다.
618년(광해군 10년)에 경덕궁(현재 경희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이후 경희궁에 크고 작은 화재들이 일어났음에도 흥화문은 건재하여 약 300년 간 그 자리를 무사히 지켰다.
1910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세우기 위해[2] 경희궁의 전각들을 헐고 몇몇 건물들을 매각하고 이건하면서 흥화문도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옮겼다가 1932년에는 장충동 박문사에서 사들여 정문으로 사용했다. 그 후 박문사에 영빈관과 서울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경희궁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3]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은 원래 궁궐의 동남쪽 모퉁이,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 자리에 동향하여 서 있었다. 수선전도에 따르면 종로-새문안로로 직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다 1915년 도로공사로 남쪽으로 이전되었으나, 현재 복원된 흥화문은 원래와 달리 남향으로 되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숭정전
그러나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4]한 뒤, 경희궁은 다시 버려졌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에 일제는 숭정전과 그 인근에 일본인 학교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5]를 세웠다. 숭정전은 한동안 제자리에 있었는데 1926년에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에 매각되어 법당으로 바뀌었고[6], 기존 숭정전 자리에는 학교 식당이 들어섰다.
태녕전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태령전과 그 일대를 영조의 장례공간으로 활용했다. 우선 혼전을 이곳에 두었고#[4] 태령전 근처에 재실 도수연을 세웠다.#, 또한 정조 자신이 머물 여막을 태령전 남쪽 행각에 두었고# 인산 날 여기서 망곡례를 행했다.